지관이 벌에 쏘여죽은 벌고개 이야기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 자미산 기슭 동쪽엔 큼지막한 두 개의 묘가 아래, 위로 나란히 있다. 아래 묘가 반남 박씨 시조가 되는 벌명당 박응주(朴應珠) 묘이고, 위는 손자인 박윤무(朴允茂) 묘다. 풍수 전문가에 따르면, 나지막한 자락에 터 잡은 박응주 묘는 앞은 시원하게 트이고 뒤는 산자락에 기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명당이라고 한다. 주위 산세에 험한 곳은 찾아볼 수가 없고, 묘 뒤에 서면 맨 먼저 편안한 감정이 느껴져 복 받은 땅으로 조선조에 왕후, 정승 등 인재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땅이라는 것이다. 

벌명당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시대 나주지방에 박의(朴宜)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의 부친이 세상을 뜨자 이웃에 사는 지관(地官)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했다. 지관이 이리저리 지세를 살펴보다 천하의 명당자리를 발견했다. 고개 너머 자미산(자미산성이 있는 산)의 느긋한 산허리를 둘러보더니 흥덕리 동쪽에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하지만 천기(天氣)를 누설하게 돼 화(禍)가 닥칠 것을 두려워 한 지관은 실제보다 약간 위쪽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박지관은 풍수지리라면 박의도 조금은 아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박지관이 잡아주는 자리보다 차라리 그 아래가 더 좋을 듯싶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박지관이 정해주는 곳이라 우선 표시를 해놓고 속으로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박지관의 뒤를 밟았다.

한밤중에 지관의 집을 찾아간 박의는 그곳에서 지관 부부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때마침 그날 묘지를 잡아준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호장어른 묘자리는 괜찮은 데로 잡아 드렸어요?”라고 그의 아내가 묻자 지관이 “기막힌 자리가 있었는데 지금의 묏자리보다 조금 아래쪽이 천하의 명당자리요. 하지만 그곳을 가르쳐주면 천기를 누설한 죄로 내가 벌을 받게 될 것이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듣게 된 박의는 이튿날 지관이 말한 그 아래쪽에다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사이 무덤 일을 도와주려고 고개를 넘어온 박지관은 박의가 사람들을 시켜 땅을 파고 있는 것을 보더니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박의에게 “왜 내가 잡아주는 자리는 피하느냐”고 물었더니 박의는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 자리가 더 좋을 듯싶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박지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상주에게 “이것은 모두가 운명일세. 사실 자네가 파는 이 자리가 명당일세. 내가 천기누설로 화를 입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는데 자네가 알아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 내가 집에 도착하게 될 때까지 땅 파는 것을 늦춰주게나” 하고 부탁하고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상주는 잠시 작업을 중단하고 지관이 집에 도착했다고 여겨지는 시점에 다시 땅 파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구덩이를 다 파고 나자 참새만큼 큰 벌떼가 쏟아져 나오더니 고개를 막 넘고 있던 박지관의 뒤를 쫓아가서 뒤통수를 쏘아 죽여 버렸다. 

그곳에 무덤을 쓰고 나서 박응주의 현손 박상충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예조정랑에 이르고 그 이후 벼슬길이 끊이지 않아 조선시대에 반남 박 씨는 명문거족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후손들은 명당의 발복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박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를 ‘벌고개’ 라 부르고, 박응주의 묘자리를 ‘벌명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박씨 문중에서는 벌 고개 바위에다 이를 기려 ‘봉현’(蜂峴)이라 새기고, 오늘까지 매년 시월 보름날 박지관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한다.

풍수전문가에 따르면, 벌명당은 뒷산의 봉우리가 멍덕(토종 벌통 위를 덮는 뚜껑, 짚으로 바가지 비슷하게 틀어 만듦) 모양으로 주변의 산세가 꽃을 닮은 지역을 말한다. 즉 묘가 있는 등성이 벌통이 되고, 주위 산들이 꽃이 되는 지형인데, 이런 곳에 묘를 쓰면 벌 떼처럼 그 자손이 번성하며, 벌 떼들이 꿀을 모으듯 재물과 명예가 뒤따르게 된다고 한다.